엘든 링 밤의 통치자는 왜 나왔을까?
어느 날 갑자기 기습 발표된 엘든 링 밤의 통치자(이하 엘밤통). 기존의 흥행 IP였던 소울라이크 게임들과는 달리, 액션성이라는 틀만 유지하고 게임의 진행 방식은 싸그리 갈아엎은 새로운 게임이다.
기업으로서 새로운 시도는 늘 옳다지만, 왜 이런 형식이어야 했을까? 엘밤통의 "왜"를 파악하기 위해, 프롬 소프트웨어가 느꼈을 법한 한계와 발전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필요성: 주인공
게임이라는 매체의 가장 큰 특성은, 굉장히 상호작용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매체들 - 예를 들어, 영화나 책 등 - 과는 다르게, 우리는 게임의 주인공을 "나"로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포켓몬스터에서 주인공이 꼬렛을 한 마리 잡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친구에게 이야기할 때 "지우가 꼬렛을 잡았다"고 할 것이고, 포켓몬스터 게임이었다면 친구에게 이야기할 때 "내가 꼬렛을 잡았다"고 할 것이다.
게임의 주인공은 그런 의미로 나누었을 때 2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 특정한 캐릭터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행동하는 대로 게임에서의 어떤 역할을 배정받거나, ⓑ 특정한 캐릭터로서 게임의 이야기 내에 고정된 역할을 지니고 있거나. 위 두 방식에는 당연히 장단점이 있다.
게임의 주인공이 특정한 캐릭터가 아니라면(보통 캐릭터 커스터마이즈가 가능한 경우), 플레이어들은 캐릭터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한다. MMORPG의 캐릭터들이 그렇고,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헌터들이 그렇고, 다크 소울 시리즈, 엘든 링의 재의 귀인이나 빛 바랜 자가 그랬다. 이 경우 플레이어의 몰입에 방해되는 가장 큰 요소인 주인공 캐릭터의 자아가 삭제되기 때문에 액션이나 조작의 몰입감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고, 주인공이 어디로 가든 그것은 플레이어의 의지이기 때문에 기획 시 레벨 디자인과 핍진성의 모순에 대한 부담도 크게 줄어든다.
게임의 주인공이 특정한 캐릭터라면 플레이어들은 캐릭터와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진 않는다. 이 경우, 주인공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게임 전체에 대한 평가가 내려가는 위험이 존재하고, 주인공 캐릭터의 행동이 플레이어의 의도와 달리 캐릭터 자체의 자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야 한다는 기획상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예컨대, 역전재판이나 단간론파 등과 같은 추리 게임의 경우, 플레이어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캐릭터가 해당 내용에 추리해낼 수 있는 단서를 조사하지 않으면 그 내용에 대해 발설할 수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이 특정한 캐릭터일 경우는 이러한 모든 단점을 극복할 만한 중요한 장점이 존재한다. 바로 그 캐릭터에게 오랫동안 함께한 동료 같은 강한 애정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갓 오브 워 시리즈의 주인공인 크레토스에게 육아에 고뇌하는 옆집 애아빠로서의 동료애를, 하데스의 주인공 자그레우스에게 탈선하다 결국 자기 할 일을 찾아낸 비행청소년을 보는 기특함을 느끼는 식이다.
멀리도 돌아왔다. 슬슬 엘밤통의 전작들에서 프롬이 느낀 한계점으로 돌아와보자. 다크 소울이나 엘든 링 IP의 주인공은 전부 특정한 캐릭터가 아닌 커스터마이즈된 캐릭터였다. 액션 게임이기에 최대한의 몰입이 필요했고, 그들이 원하는 스토리텔링 방식에서는 행적이 특정 방식으로 정해진 캐릭터일 필요도 크게 없었던 데다가, 엘든 링에 들어와서는 아예 오픈월드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더더욱 커스터마이즈된 캐릭터일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특정한 캐릭터에 대한 강한 애정은 IP에 대한 충성도를 굿즈 수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다. 특정한 캐릭터에 대해 애정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방식과, 커스터마이즈 가능한 주인공 캐릭터는, 플레이어가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거의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는 곧 굿즈 사업의 실패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소울 시리즈를 최고의 게임이라 칭송하지만, 그 굿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보기 어렵다. 물론 굿즈에 대한 애정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그들이 발매하는 굿즈 자체가 많지 않아서인 이유도 있다. 이렇게 굿즈 발매 자체를 적게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이런 니즈의 부족을 그들도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따로의 서사가 있는 캐릭터가 플레이어인 게임을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한계: 인력
이쪽은 간단한 이야기다. 새로운 게임에 대한 필요는 있었지만, 그들의 현재 주 수익은 결국 게임 판매에서 나온다. 기업으로서 주 수익을 내팽겨치고 새로운 먹거리에만 집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인이 될 게임 개발과 "동시에" 새로운 게임 개발에도 발을 뻗어 봐야 했다.
부족한 인력으로 멋진 게임을 내는 - "가성비" 개발 -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널리 쓰이는 2가지가 바로 멀티플레이어와 로그라이크다.
멀티플레이어는 - 특히 무작위 매칭 시 - 개인간의 실력과 지식의 차이에 의해 늘 새로운 경험을 만들 수 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생긴다는 점에서 운영 상의 불편한 점도 있고, 플레이어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는 있지만, 반대로 플레이어에게 '다음 판에는 더 나은 동료가 올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여러 모로 오랜 시간 질리지 않고 플레이할 수 있게 해 주는 굉장히 가성비 높은 방식이다.
로그라이크는 절차적으로 무작위적인 보상을 가진 맵을 생성하는 것으로 플레이어에게 매번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장르다. 이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가성비 높은 방식으로, 이 장르를 즐기는 플레이어는 캐릭터보다 플레이어 스스로의 성장을 기대하고 게임을 즐기게 된다. 이런 플레이어는 개발자가 안배한 모든 캐릭터 성장 요소를 끝마치더라도 끝없는 플레이어 성장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더 오래 질리지 않고 플레이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방식을 섞는다면 재미있는 시너지가 난다. 친구와 함께라면 복도에 양동이 들고 서 있기만 해도 즐겁다고 하던가. 로그라이크 취향이 아닌 사람이라도, 친구와 함께 멀티플레이를 하게 된다면 한 번 더 플레이하게 되고, 지식이 어느 정도 쌓여야 더욱 재미있는 로그라이크 장르의 초반 진입장벽을 훨씬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시너지 있는 두 가성비 개발론을 함께 섞는 것으로, 그들은 더 적은 비용 - 인력 - 으로 새로운 게임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점: 두터운 팬층
상술한 방법들보다 더욱 개발 가성비가 높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리소스를 활용하는 것이다. 프롬 소프트웨어는 이미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전작들이 있기 때문에, 전작들의 리소스를 최신작에 호환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작의 리소스 활용이라는 방법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재탕이라는 혹평을 듣는 것이다. 이전의 리소스라는 것은 그만큼 기술이든 기업이든 덜 성숙했을 때의 물건이라, 최신 트렌드와는 다를 수도 있고 이미 사용자가 질리도록 봐서 불쾌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오히려 질리도록 본 사용자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롬 소프트웨어의 작품 특성상, 전작 게임들을 사랑해서, 스스로 선택해서 질리도록 본 사용자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전 리소스 활용은 그들에게 추억을 자극한다는 멋진 골동품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엘밤통을 플레이할 때 소울 시리즈 초기작의 보스들(지네 데몬, 용철 데몬, 탐식의 드래곤 등)은 솔직히 패턴이 너무 뻔히 보이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추억으로 받아들여지고 나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이전 작품들의 보스들을 재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론: 엘든 링 밤의 통치자
엘밤통이 ⓐ커스터마이징 불가능한 캐릭터를 골라서, ⓑ친구들과 함께 로그라이크 식으로, ⓒ추억의 보스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게임으로 개발된 배경에는 이런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재미있지 않았는가?
글도 썼겠다, 오늘도 딱 한 판만 하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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